2014년 5월 27일 화요일
(3) 강제 병합과 이루지 못한 독립 - 일본과 류큐국
18세기 후반 무렵 일본은 서양과의 통상 조약 문제로 인해 막부 정부와 반 막부 세력의 대립이 발생, 곧 막부는 패배하여 왕정 체제로 돌아가게 된다.
이 후 일본은 사람들이 익히 들어본 메이지 천황의 시대가 열리고 주변국들을 차례로 무력 점령, 합병하며 제국주의의 위세를 떨치게 되는데 우리는 흔히 이러한 일본의 제국주의에 첫번째로 희생된 나라가 조선이라 알고 있다.
하지만 이는 명백히 잘못된 정보이며 일본 제국주의의 첫번째 희생양은 중화민국(대만), 두번째가 바로 바로 류큐국이다.
역사 시간에 열심히 공부를 하셨다면 한번 쯤 지나가듯 들어봤을 법한 이름인데 이 류큐국은 현재의 오키나와 근방을 다스리던 왕국이었다.
1429년에 통일로 인해 건국된 이 류큐국은 일본과는 완전히 다른 나라였으며 실제로 중국이나 일본, 동남아시아와 중계 무역을 하며 번성했으나 1609년 사쓰마 번의 침공을 받아 자치권을 가지고 있는 일종의 식민지로 전락한다.
그때까지만 해도 조공을 바치는 대상이 중국에서 일본으로 바뀌고 내정간섭이 더욱 심해졌다는 것 말고는 이전과 동일하게 왕국의 기틀을 유지할 수 있었는데 1879년 다시 일본 제국의 침공을 받아 450년여의 왕조 시대가 끝나고 오키나와 현이 되었다.
이 후 류큐국에 살던 많은 사람들 역시 고통을 받게 되는데 일본의 제국주의적 대외팽창 정책에 의해 태평양 전진기지가 들어섰기 때문이다.
게다가 2차 대전이 거의 끝나갈 무렵 엎친데 덮친 격으로 미 해병대가 오키나와에 상륙했고 본토로 밀고 올라가는 격전지가 되면서 많은 수의 민간인 사상자가 바로 이 류큐국 출신 민간인들이었다.
일본에 점령당해 일본이 패망하기만을 바랬던 많은 나라들과 달리 이들은 결국 독립을 이루지 못했다.
아까도 언급했듯이 미 해병대가 최초로 상륙한 곳이 바로 오키나와였고 전 후 전 국토의 85%가 미군 기지화 되었는데 만약 이 류큐국을 독립국으로 인정해 버린다면 일본에 대한 감시를 목적으로 주둔시킨 병력 자체가 정치적인 문제로 무용지물이 될 가능성이 높았으며 전쟁 중 발생한 오키나와 민간인 피해 문제 역시 패전국을 상대로 우월한 입장에서 상대하는게 아닌 전혀 다른 제 3국에 대한 동등한 입장에서 상대해야 하기에 당시의 미국 입장으로서는 여러가지로 난처하기 때문이다.
결국 일본의 패망에도 불구하고 류큐국은 독립을 하지 못했고 몇십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오키나와인이 일본 본토로 가기 위해서는 비자를 발급 받아야 하는 등의 차별을 당하기도 했다.
이러한 일본의 차별도 문제지만 2005년 당시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만 보더라도 1029명의 류큐인 중 40.6%는 '자신들이 오키나와인이며 일본인과는 뚜렷하게 구별된다'고 할 정도로 민족적 의식도 뚜렷하기 때문에 류큐 독립운동을 펼치기도 했으나 이미 정치, 경제적으로 완벽히 일본에 귀속되어 버린 현실에 독립 지지는 24.9% 밖에 그치지 못했고 그마저도 매년 떨어지는 추세다.
하지만 우리가 오키나와를 절때 일본과 동일 시 해서 볼 수 없는 이유가 과거 우리나라와 류큐는 서로 인도주의적인 움직임을 보였기 때문이다.
가령 예를 들어 왜구에 붙잡혔던 고려인을 보호하여 고려로 돌려보낸 적도 있고 왜구에게 잡혀 류큐에 팔려간 44명의 조선인을 쇄환시킨 일이 있기도 하며 이 뿐 아니라 류큐인들이 제주도나 경상도에 표류한 일과 반대로 조선인이 류큐국의 요니구시 섬에 표류한 적도 있는데 다시 서로의 나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도와준 일도 있었다.
게다가 임진왜란이 발생하기 전 일본이 명나라를 정벌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달라 조선에 요구했던 일은 한국인이라면 누구든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때 류큐국이 아니었다면 도리어 조선이 일본과 명나라에 쌈싸 먹히는 사태가 발생할 수도 있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이 있을까?
위에 서술한 일본의 요구에 되려 명나라는 범인이 제 발을 저리듯 조선이 일본에 협력해 명을 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을 품었던 것이다.
조선 역시 재빨리 사신을 보내 해명을 했으나 만약 이때 류큐국 사신이 일본의 침략 준비를 명나라에 알리지 않았다면 오해가 쉽게 풀리지 않았을 것이고 명나라의 전쟁 준비 역시 늦어져 우리나라는 조선시대부터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했을지 모를 일이다.
이에 그치지 않고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명나라와 조선을 정복하기 위해 류큐국에 협조할 것을 명령했지만 명나라의 책봉국이기도 했던 류큐국은 이를 거절, 오히려 역으로 명나라에 일본 공격을 제안하기도 했다.
그리고 잠시 쉬어가는 의미로 재미있는 사실 하나를 짚어볼까 한다.
류큐국이 실은 3개의 왕국으로 100년간을 지내다 1429년 통일이 되었다는 것과 오키나와 지방의 영웅으로 추앙받는 의적 '오야케아카하치'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오야케아카하치는 또 다른 이름으로 '혼가와라', 우리나라식 대로 한자를 그대로 읽으면 '홍가왕'으로 불린다는 것이다.
홍가왕, 의적.
누군가 떠오르지 않는가?
바로 허균의 소설 '홍길동전'의 주인공인 '홍길동'이 떠오른다.
실제로 홍길동전의 말미엔 홍길동이 율도국을 공격하여 왕을 항복시키고 세개의 나라를 세웠다고 나온다.
하지만 1429년에 통일이 되었던 류큐국과 1440년 경에 태어난 홍길동의 출생 일자만 보더라도 홍가왕을 홍길동과 동일시 하기엔 무리가 따를 것이다.
당시 류큐와 조선은 비록 뱃길 사이에 왜구가 자주 출몰하고 류큐국 사신을 사칭한 일본 상인 문제로 인해 중국을 통한 간접 교류를 행했지만 서로간 어느정도 친선이 있었기 때문에 충분히 홍길동전의 이야기 역시 류큐로 흘러들어갈 수 있었을 것이고 거기다 당시 오키나와엔 홍씨 성을 쓰는 사람이 없었다는 것을 보면 홍길동의 이름을 빌려 활동하였거나 홍길동의 후손일 가능성 역시 배제할 수는 없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이러한 류큐를 통해 배울 수 있는 점은 하나다.
아무리 민족이 다르고 역사가 다르다 하더라도 식민 생활이 오래되면 비록 민족적인 인식이 있다 하더라도 정치, 경제적으로 발이 묶여버릴 수도 있다는 것이다.
독립을 하고 싶어도 하지 못하고 아무도 관심조차 가져주지 않는 류큐국의 현실에서 일본의 패망으로 인해 독립을 할 수 있었던 것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지, 나라가 없는 설움과 애국이 무엇인지 다시 한번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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