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5월 27일 화요일

(6) 꼬일대로 꼬인 실타래 - 대한민국과 일본


현재 대한민국(이하 한국)과 일본의 관계는 실로 뜨거운 감자라 할 수 있는 지경이다.

정치적인 문제부터 시작해서 역사 문제, 영토 문제 등으로 인해 양국간 국민들 역시 감정의 골이 깊어져 미국이라는 존재를 삭제한다면 언제든 전쟁이 발발할 수 있는 아주 좋은 배경이 마련되고 있다.

그런데 안전핀 구실을 하고 있는 미국이 연이은 전쟁과 경제 문제 때문에 동북아에서 중동으로 눈을 돌리고 있어 정말 이런 초유의 사태가 발생할 확률이 점점 높아진다는게 문제다.

그렇다면 과연 이 두 국가는 정말 힘의 논리로 밖에 답을 가릴 수 없는 것 일까?

일단 한국과 일본이 지금과 같이 얽히고 설킨 배경부터 알아보지 않을 수 없다.

한국과 일본은 고대부터 교류를 해 온 사이였다.

비록 지금과 같은 기틀이 잡히기 전 이었지만 중국과 더불어 가장 가까운 외국이었고 자연히 영향이 없을래야 없을 수가 없는 존재들이었으며 사실 중국이야 육지로 이어져 있으니 우리나라와 빈번하게 국지적 충돌이 발생할 수 밖에 없었다.

남서쪽으로 세를 넓히자니 동쪽의 맹주인 고구려가 버티고 있고 그렇다고 바다를 건너 공략 하자니 백제가 버티고 있었던 것이다.

그럼 어째서 육지로 붙어 있는 대륙도 아닌 섬나라였던 일본과 사이가 나빠진 것일까?

일본이 처음 우리나라와 문화적 교류를 시작한 것은 삼국 시대 때 부터였다.

가야를 시작으로 문물을 받아들이기 시작했고 그 이후에는 차례대로 백제, 고구려, 통일 신라 순으로 교류를 시작했다.

참 사이 좋아보이기 그지 없는 그림이 펼쳐지나 일본에서는 아시카가 타카우지가 기존의 천황을 내 쫓고 새로운 천황을 세우며 내전의 양상이 펼쳐지게 된다.

전란이 오래갈 수록 백성들의 생활은 궁핍해지기 시작하고 거기다 설상 가상 두목을 잃은 사무라이(이하 낭인)들까지 해적질에 합류해 왜구들의 세력은 날이 갈 수록 불어나 고려의 백성들은 정말 말 그대로 탈탈 털리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던 것이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왜구에 한정된 이야기고 왜구가 곧 일본 조정의 대표는 아니었기에 외교적으로 사이가 나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을 일부 통일하자 순식간에 잉여가 되어버린 직업 군인들과 해적질 외엔 할 것이 없었던 기타 잉여 왜구들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있어선 날이 퍼렇게 선 칼이나 마찬가지였고 언제 자신의 목이 베일지 모르는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대륙으로 눈을 돌리면서 이야기가 달라진다.

곧 일본은 조선에서 보낸 통신사를 통해 명나라 침공을 위해 협조하라는 서신을 그것도 아주 거만하게 보냈는데 명나라를 정벌할테니 길을 열어 달라는 말은 말 그대로 '이리오너라! 너희 동맹국 때리러 가는 길이다!'라는 것이었고 당시 일본을 어줍잖게 여기던 조선으로서는 일본의 거만한 태도와 요청이 말 그대로 미친놈이 하는 개소리로 밖엔 들리지 않았다.

그 전 까지만 하더라도 통신사를 보내는 등 활발히 교류를 하던 사이였지만 곧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임진왜란이 터졌고 이때부터 일본과 우리나라의 사이는 급격히 틀어지기 시작한다.

다만 임진왜란이 발발한지 7년이 되던 해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급속도로 건강이 악화되어 죽었고 한반도로 쳐들어왔던 원정군에게도 철수 명령이 떨어져 그렇게 전쟁이 끝났으며 이 후 새로이 정권을 잡은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사과문을 보내고 국교 재개를 요구하는 등 감정이 아닌 외교적으로는 어느 정도 냉랭했던 분위기가 풀리고 두 나라 사이에도 봄이 오는 듯 했지만 한국 사람들이라면 당연히 알아야 하고 잊을 수도 없는 경술국치로 인해 나라가 통째로 넘어가면서 감정의 골은 더욱 깊어지게 되었다.

특히 한반도에 무혈입성한 일본은 창씨개명, 조선어 금지, 궁성요배 등 민족 말살 정책과 더불어 미곡 수탈, 위안부 징집, 노동력 동원, 폭행 등 설명하자면 끝이 없는 인권 유린을 자행했는데 이러한 행위가 불에 끼얹는 기름으로 작용하면서 더더욱 일본에 대한 적개심이 커지게 되었다.

다행히 일본의 삽질로 말미암아 미국이 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게 되었고 원자폭탄 두 기를 투하해 마무리 함으로서 근 35년간의 치욕스런 일제강점기를 끝내고 우리나라도 독립하게 된다.

그리고 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세계는 새로이 냉전의 시대로 접어들게 되면서 미국의 작용과 더불어 당시의 사정 등을 이유로 두 나라의 국교는 정상화 되었지만 아직까지도 두 나라 국민의 적개심은 해소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왜 이런 적개심이 아직도 사라지지 않는지를 따져보지 않을 수 없는데 일본을 점령한 미군정은 소비에트의 공산주의 확산을 막기 위해 일본을 서둘러 안정시킬 필요가 있었고 그에 따라 전범 처리가 거의 확실하게 마무리된 독일과 달리 A급 전범을 제외한 전범들을 그대로 국가 주요 요직에 임명했기 때문이다.

이때 요직을 차지한 전범들은 최대한 미국에 협력하면서 공산주의를 저지하는 동시에 극우적 노선을 타게 되고 그러다보니 자연히 과거사 문제는 물건너 가 버리게 된 것이다.

이렇게 기틀을 마련한 극우 세력은 미국에 패해 꼭두각시가 되었을지언정 과거의 영광에 사로잡혀 있었고 당연히 과거에 저지른 침략 행위와 인권 유린 문제를 미화시키거나 숨기는 등 철저하게 자기들 입맛대로 교육함으로서 국민들 역시 극우적 성향을 띄게 만들었다.

물론 일본의 모든 국민들이 극우화 된 것은 아니지만 과거의 치부를 철저히 숨겨 그러한 일들이 있었다는 것을 모르거나 잘못 알게된 국민들은 한국인들이 보이는 적개심에 대한 반작용이 일어나 결과적으로는 반한적인 모습으로 되돌아 오는 것이다.

게다가 이런 시스템이 구축된 상황에서 정치인들이 기존의 극우적 노선에서 협력적 노선으로 바꾼다면 과연 국민들은 그런 정치인들을 순순히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결국 현 시대에 이르기까지 서로간의 불신이 깨지지 않는 이유는 최초에 잘못 끼워맞춰진 톱니바퀴의 작용으로 일본에서 정치 활동을 하려면 지지율을 높이기 위해 본심이든 아니든 좋던 싫던 간에 무조건 극우 노선을 탈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설령 이런 세태는 타파할 수 없는 것일까?

물론 어렵겠지만 아직 방법은 남아 있고 늦지 않았다.

우선 일본은 당장 극우 노선을 벗어나긴 어렵겠지만 역사 교육 개혁을 통해 여지껏 잘못 교육되어 온 역사 문제를 중립적인 시각에서 새로이 기술하여 각 학교에서 교육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또한 과거사 문제를 청산하고 피해국에 보상을 하면서 주변국들과의 관계 개선에 노력해 성공적으로 화합, EU의 중심이 된 독일의 사례를 연구하고 수용하는 것도 좋은 방법일 것이다.

반면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준비해야 할 것인가?

우선 현 한국인들의 정서 상 일본이 진심어린 사과의 손길을 내민다 하더라도 웃으며 맞잡아 주긴 어려울 것 같다.

당장 인터넷에 올라오는 일본 관련 뉴스 댓글만 보더라도 일본의 문제점에 대해 진지하고 냉철하게 분석해 비판하는 사람들 보단 감정적으로 욕설을 남기거나 일본 자체를 비하하는 행위들을 더 많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일상에서도 일본과 관련된 이야기가 나오면 일본 극우 세력들이 하는 것과 똑같이 깔보고 무시하며 비꼬는 모습을 흔히 접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선 일본이 진심을 다 해 고개숙여 사죄하더라도 좋은 반응은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일본도 위에 서술한 문제가 있기 때문에 당장 사죄를 해 오진 않을지라도 언젠가 그런 날이 올 것을 대비해 그들이 진심으로 사죄를 하고 용서 받길 청원한다면 우리 역시 웃으며 받아들일 수 있는 미덕을 갖춰야 한다.

그들이 사죄를 한다고 당연하다는 반응을 보이거나 비웃음으로 일관한다면 지구가 멸망하는 날 까지 우리나라와 일본의 화합은 영영 바랄 수 없는 사태가 발생할 지 모른다.

우리가 과거에 치욕스런 고통을 당했고 쉽게 용서하기 힘든 모욕을 당했지만 대국을 앞서보고 미래를 준비해야 한다면 올바른 과거 청산과 더불어 화합의 길을 모색하여 크게는 중국, 기타 아시아 국가들까지 포용해 세계에서 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힘을 길러야 한다.

미국이 괜히 경제력, 군사력을 바탕으로 세계에서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는게 아니라는 점을 꼭 기억하길 바란다.

(5) 현대에도 이어지는 계층 이지메 - 일본과 부락민


현대의 대한민국이나 일본은 법적으론 신분 제도가 철폐된 법치국가다.

특히나 우리나라는 자신이 양반 가문의 후손이라느니 상놈 출신들이 건방지다는 발언을 하며 우쭐해 하면 비웃음 당하기 십상일 정도로 과거에 존재했던 신분 제도로 부터 완벽히 동 떨어진 사회가 되었다.

물론 일본 역시 메이지 유신때 국가적으로 이러한 신분 제도가 철폐되었다.

그렇다면 현실은 어떠한가?

애석하게도 일본은 아직 이러한 신분 제도의 망령으로 부터 완벽히 벗어나지 못했는데 현재도 '부락민'이라는 부류가 남아 있을 정도다.

이 부락민들은 신분 제도가 철폐되기 전, 즉, 현재 부락민들의 조상은 우리나라로 치면 일종의 천민이나 다름 없었다.

정말 어이가 없는 것은 이들은 비교적 최근에 일본에 편입된 류큐인이나 아이누족, 이 후 합류한 재일 한국인, 재일 중국인들과는 다르게 현존하는 일본인들과 유전적으로 전혀 차이가 없는 '동족'임에도 불구하고 대우가 좋지 않다는 것이다.

에도 시대에는 '히닌', 우리나라식 대로 한자를 읽으면 '비인(非人)', 즉, '인간이 아닌 자가 인간의 형상을 취하고 있다'는 불교 법화경의 용어에서 유래된 비하적 명칭으로 불리기도 했을 정도로 인권과는 거리가 먼 대우를 받았을 정도다.

왜 아직까지 이런 악습이 되풀이 되고 있는지에 대해 알아보자면 신분 제도가 있던 다른 국가들과 비교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일단 우리나라만 해도 갑오개혁을 통해 신분제가 완전히 철폐됐지만 한번 천민은 영원한 천민이라도 되는 듯 천민 출신에 대한 차별은 여전히 존재했다.

그런데 해방이 되고 곧 터진 6.25 전쟁으로 인해 국가 기반 자체가 깡그리 파괴 되었고 완전히 무로 돌아간 땅에서 다시 시작하게 된 사람들은 일단 먹고 사는 문제가 가장 시급했기에 과거의 신분 따위는 신경쓸 겨를이 없었고 비로소 평등의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카스트 제도라 불리우는 신분 제도가 존재하던 인도의 경우만 봐도 급격한 발전과 더불어 국가가 앞장 서 과거 하층민 출신에게 세금 감면 등 사회적인 혜택을 더 주었고 인도에 진출한 외국계 기업들은 신분보다 능률을 우선 시 했기에 점차 인도 국민들 사이에선 과거에나 존재하던 카스트 제도 보단 실력과 사회적 지위를 더 인정하게 되면서 자연스레 평등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태평양 건너 미국에서는 아프리카 등지에서 대려온 흑인 노예들이 영국으로 부터 독립한 후에도 여전히 남아 있었지만 1세기 후 발발한 남북 전쟁 때 북부 연방이 영국과 프랑스의 간섭을 막기 위한 정치적인 장치로 노예 해방을 선언해 버리면서 신분 제도가 사라졌다.

하지만 일본은 비록 원자 폭탄 두 방을 맞긴 했지만 우리나라 처럼 국가 기반 자체가 갈려버리는 큰 전쟁은 겪은 적이 없었고 인도처럼 급격한 발전도 없었으며 미국 처럼 정치적으로 갈라서 싸운 적도 없었다.

즉, 법적으로 신분 제도는 철폐된지 오래지만 국민들에겐 신분 철폐에 대한 당위성이나 인식의 변화를 요구하는 사건 자체가 없었다는 것이다.

물론 일본과 비슷한 길을 걸어온 영국도 있지만 영국은 이전부터 내부에서 지속적인 개혁 시도가 있었고 결정적으로 산업 혁명이 발생하면서 많은 돈을 벌기 위해서는 거대한 토지 소유보단 기술이 더욱 필요해 지면서 자연스레 사라졌다.

사실 신분보다는 능률이 앞서는 21세기에 이러한 차별과 인식은 자연스레 도태되어야 정상이지만 어째서 일본은 아직까지 이러한 차별과 불평등이 존재하는걸까?

우리나라는 가업보단 자신의 꿈이나 인생을 우선 시 하는 편이지만 일본의 드라마나 애니메이션, 영화 등을 보면 유독 가업을 잇는 것과 자신의 꿈 사이에서 고민하는 에피소드를 자주 볼 수 있을 것이다.

변화를 싫어하는 일본 특유의 국민성과 살아 남기 위해 하나의 가문으로 뭉쳐 다른 가문과의 대립을 겪어온 일본에게 있어 이러한 가업을 잇는 문화는 거의 당연 시 해야하는 전통이다.

이렇게 가문끼리 뭉쳐 살다보니 마을을 구성하는 구성원들은 대부분 가문에 속한 사람들이 될 수 밖에 없었고 그런 마을은 당연히 뒤 따라오는 폐쇄성이 존재하기 때문에 살던 마을을 벗어나 다른 지역으로 이주를 하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 이었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누가 어느 집안의 후손인지 출신만 봐도 알 수 있을 정도였고 당시 천민 출신이던 사람의 후손은 현재에 와서도 부락민이라는 꼬리표를 뗄 수 없는 것이다.

그럼 이런 부락민들에게 어떤 차별이 따라다니느냐가 궁금해 지지 않을 수 없을텐데 현대에 들어선지 꽤나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취직은 고사하고 결혼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지경이다.

간단하게 예를 들자면 어떻게든 잘 숨겨서 취직이 됐다 하더라도 부락민 출신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면 이런 저런 이유로 부당하게 해고 당하는 건 당연하고 부락민 가문과 보통 가문의 두 사람이 아무리 사랑하는 사이라 할 지라도 한쪽이 부락민 출신이라는 것을 알게되면 보통 가문에서는 아예 집안 전체가 쌍수들고 결혼을 반대할 정도다.

특히 취직 문제는 과연 현대에 발생한 일이 맞나 싶을 정도로 어이가 없는 일도 발생하는데 기업의 인사 담당자들이 사립 탐정 사무소나 흥신소 등을 이용, 비밀리에 부락민 리스트를 만들어 지원자의 출신을 대조한 뒤 부락민 출신 지원자를 불합격 시키는 등 우리나라로 치면 법적으로 금지하는 신상털기를 대기업에서 암암리에 저질렀던 것이다.

게다가 멀쩡한 사람을 부락민 출신이라는 이유로 경찰이 끌고 가 고문에 의한 거짓 자백을 받아낸 후 살인 사건의 범인으로 법의 심판을 때리는 등 들어도 믿지 못할 여러가지 사회적인 불이익도 있있다.

이쯤되면 나라는 대체 뭘 하고 있는 건가 싶기도 한데 한 가지 에피소드 하나를 기술해 볼까 한다.

한때 일본에서는 차기 총리로 유력했던 노나카 히로무라는 정치인이 있었다.

극우 색채를 강하게 띄는 현대 일본 정치판에서 정말 보기드문 개념 정치인으로 그가 한 발언 중에서는 이러한 말도 있었다.

"한반도에서 끌려온 사람들이 학대받는 모습을 몇번이나 본 적이 있다. 나에게는 너무 심하게 보였고 죄책감을 느꼈다. 그런 것을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에 불식시키고 한반도와의 신뢰 관계를 만들어 두고 싶었다."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북한, 중국에도 비교적 우호적이었고 종군위안부 문제나 난징대학살 문제도 인정했으며 메이지 유신 때 외국의 문화를 무분별하게 받아들여 정착하게 된 부부동성에 반대되는 부부별성 정책을 추진하기도 했던 이런 개념 정치인이 고이즈미 준이치로에게 패해 떨어졌는데 어처구니 없게도 부락민이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특히 무언가 말 한마디를 하더라도 의표를 눈치 채지 못하게 빙빙 돌려 최대한 예의 바르게 이야기하는 일본인의 특성은 그 누구라도 알고 있을텐데 이러한 특성이 유명무실하게 부락민 출신이라는 이유 만으로 '저런 부락민 출신 같은 자가 천황 폐하를 보좌한다면 일본은 그대로 망할 것이다'라는 소리까지 들어야 했다.

이런 소리를 했던 '아소 타로'라는 인물 자체가 개념이 없기로 잘 알려져 있지만 그래도 저런 발언을 아무렇지도 않게 할 정도면 어떤 상황인지 대충 짐작은 갈 것이다.

아무리 부락민들의 조상인 과거 천민들이 당시 천대시 하던 직종에 종사 했다 하더라도 이런 불평등과 차별이 연좌제처럼 따라다니는 건 결코 정상이 아니다.

무슨 직종이든 사람이 합법적인 직종에 종사한다면 반드시 누군가는 해야하는 필요한 일이고 아무도 하지 않으려 하는 일을 했다면 더더욱 천시 받아야 할 것이 아닌 그에 대한 대우를 받아야 정상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당시 영국의 사법체계 자체가 부실하긴 했지만 영국인과 미국인들이 대다수 범죄자 출신이었던 영국계 호주인의 후손들을 천민 취급하지는 않지 않는가.

정상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여기까지만 읽어봐도 충분히 눈이 찌뿌려질텐데 문제는 이러한 일본의 문제가 일본에 국한된 것이 아닌 우리에게도 충분히 발생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당장 우리 사회만 돌아봐도 돈에 의해 좌우되는 새로운 신분에 따라 대우가 달라지지 않는가.

이런 부락민들의 현실은 다른 방식으로 언제든 우리에게도 현실로 다가올 수 있으며 그런 문제가 발생되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숙제라는 점을 강조하며 이만 줄인다.

(4) 민족까지 부정당했던 슬픈 역사 - 일본과 아이누족


현대의 일본인들이 부흥하기 전부터 일본 홋카이도 지방에는 대대로 터를 잡고 살던 선주민 아이누족이 있었다.

이들의 문화와 언어, 종족은 당시 큐슈와 혼슈 지방에 거주하던 일본인들과는 상이하게 달랐으며 동, 식물, 생필품, 자연 현상, 역병 등에 각각 영혼이 깃들어 있다고 여기는 것으로 보아 우리가 흔히 인디언이라 칭하는 아메리카 원주민의 문화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이들이 어쨰서 현재의 일본인들과 섞여 살게 되었는지를 살피자면 일본의 고대 시대부터 살펴봐야 한다.

그 당시 일본은 야마토 정권(이하 일본)이 들어선 시대였는데 현재의 일본 열도 전체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 아닌 도쿄 기준 서쪽 방면에 한하고 있었다.

반면 아이누족은 홋카이도에서 출발해 토호쿠 지방까지 진출해 있는 상황이었는데 일본은 이런 아이누족을 포함해 자신들의 통치를 받지 않는 사람들을 에미시라 부르며 정벌하려 했다.

결국 아이누족은 토호쿠 지방을 뻇기고 홋카이도에 한정해 영역을 구축하고 있었지만 곧 홋카이도 남부까지 일본에게 떨어지고 마는데 사실 이때까지만 해도 별 다른 저항이 없었던 것 같지만 한 아이누족 소년의 억울한 죽음으로 인해 아이누족의 무장 봉기로 번지게 된다.

그 시기 까지도 아이누족에겐 제철 기술이 없었고 때문에 철기는 일본에서 전량 수입해다 써야 하는 형편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아이누족 소년이 일본인 대장장이에게 작은 칼을 주문하려 했지만 가격과 품질 문제로 실랑이를 벌이다 그만 대장장이가 소년을 칼로 찔러 죽이고 만 것이다.

1456년에 발생한 이 사건은 결국 다음 해인 1457년 아이누족의 무장 봉기로 이어지게 된다.

초반엔 아이누족도 승승장구하여 일본의 무역 거점들을 차례로 점령했지만 이 무장 봉기를 이끌던 코샤마인 부자가 타케다 노부히로의 군대에게 살해당하며 붕괴되기 시작했으며 이 후에도 약 1세기에 걸쳐 저항은 계속 되었으나 결국 패배했고 일본은 홋카이도 남부에 마쓰마에 번을 구축했다.

허나 아이누족은 이에 굴하지 않고 샤크샤인의 난, 쿠나시르·메나시 봉기 등을 통해 꾸준히 일본을 상대로 저항했지만 번번히 마쓰마에 번에 의해 저지되었다.

사실 이쯤되면 보통은 사이 좋게 지낼 법도 하지만 아이누족이 왜 이리 심하게 저항을 했는지 궁금해지는데 홋카이도가 완전히 일본의 손에 떨어지면서 아이누족의 생활은 비극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자신들의 고향이라 부를 수 있는 땅을 점령한 일본으로부터 갖은 멸시와 차별을 당했으며 심지어 노예 취급을 받기까지 했고 그러한 멸시와 차별, 노예 취급으로 부터 비롯된 악습은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어 아이누족 출신이거나 혼혈인 사람들 역시 자신이 아이누족임을 떳떳히 밝히지 못하는 비참한 신세로 전락했다.

한때 일본의 토호쿠 지방까지 진출했던 아이누족은 고향마저 잃고 꿈이라곤 찾을 수도 없는 신세가 되었지만 우연찮게 이들에게도 기회가 찾아왔다.

일본이 근대에 들어 사무라이로 대표되는 도쿠가와 막부(이하 막부)에서 메이지 천황(이하 신정부)에게 권력이 집중되며 막부를 따르는 사무라이들과 신정부를 따르는 사무라이들 사이에 긴장감이 조성되었고 곧 보신 전쟁이 발발하게 된다.

막부군은 이 보신 전쟁에서 계속 밀리고 밀려 말미에는 홋카이도까지 후퇴하게 되는데 아이러니 하게도 과거 자신들을 탄압하던 후예들이 에조 공화국을 세우자 막부군에 합류해 신정부군에 대항했다.

하지만 에조 공화국이 신정부군에 의해 함락되고 아이누족의 희망은 그대로 꺼져버렸다.

게다가 홋카이도에서 많은량의 석탄이 발견되면서 마치 캘리포니아에서 금이 발견되자 골드러시를 감행한 미국인들과 같이 많은 수의 일본인들이 홋카이도로 몰려들었고 석탄을 수송하기 위한 철도가 설치되기 시작, 아이누족은 강제 이주와 토지 수탈 같은 아픔을 겪어야 했다.

그리고 비록 소수이지만 러시아에 살고 있던 아이누족은 러시아에 의해 의도적으로 전통이 말살되어 버렸다.

이러한 탄압과 핍박을 받았으면서도 일본 정부로 부터는 그 어떠한 공식적인 사과도 없었으며 소수민족으로 인정 받지도 못했었다.

그나마 1996년 일본 정부는 '일본은 모두 하나의 민족'이라는 기존의 주장을 철회, 소수민족이 존재한다고 공표했지만 아이누족은 그때도 민족으로 인정 받지 못했으며 2008년에 들어서야 민족으로 인정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비록 최근이긴 하지만 2010년 과거 자신들의 조상이 저지른 비인륜적인 폭력 행위, 정책등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사과하며 교과서에도 반영시켜 과거사를 반성하려는 미국과 사뭇 비교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슬픈 아이누족의 역사가 남 일 같이 느껴지지 않는 현실이 씁쓸할 따름이다.

하지만 이런 아이누족의 역사를 되짚어 봤을 때 우린 역시나 또 하나의 교훈을 얻을 수 있다.

결국 인간도 동물이며 동물의 세계에선 일종의 룰이나 마찬가지인 약육강식의 법칙을 철저히 따르고 있다.

우리가 이렇게 도태되지 않기 위해서는 그 누구보다 노력해야 하며 다시는 이런 비극이 발생하지 않도록 인류 평등의 길을 걸어야 할 것이다.

(3) 강제 병합과 이루지 못한 독립 - 일본과 류큐국


18세기 후반 무렵 일본은 서양과의 통상 조약 문제로 인해 막부 정부와 반 막부 세력의 대립이 발생, 곧 막부는 패배하여 왕정 체제로 돌아가게 된다.

이 후 일본은 사람들이 익히 들어본 메이지 천황의 시대가 열리고 주변국들을 차례로 무력 점령, 합병하며 제국주의의 위세를 떨치게 되는데 우리는 흔히 이러한 일본의 제국주의에 첫번째로 희생된 나라가 조선이라 알고 있다.

하지만 이는 명백히 잘못된 정보이며 일본 제국주의의 첫번째 희생양은 중화민국(대만), 두번째가 바로 바로 류큐국이다.

역사 시간에 열심히 공부를 하셨다면 한번 쯤 지나가듯 들어봤을 법한 이름인데 이 류큐국은 현재의 오키나와 근방을 다스리던 왕국이었다.

1429년에 통일로 인해 건국된 이 류큐국은 일본과는 완전히 다른 나라였으며 실제로 중국이나 일본, 동남아시아와 중계 무역을 하며 번성했으나 1609년 사쓰마 번의 침공을 받아 자치권을 가지고 있는 일종의 식민지로 전락한다.

그때까지만 해도 조공을 바치는 대상이 중국에서 일본으로 바뀌고 내정간섭이 더욱 심해졌다는 것 말고는 이전과 동일하게 왕국의 기틀을 유지할 수 있었는데 1879년 다시 일본 제국의 침공을 받아 450년여의 왕조 시대가 끝나고 오키나와 현이 되었다.

이 후 류큐국에 살던 많은 사람들 역시 고통을 받게 되는데 일본의 제국주의적 대외팽창 정책에 의해 태평양 전진기지가 들어섰기 때문이다.

게다가 2차 대전이 거의 끝나갈 무렵 엎친데 덮친 격으로 미 해병대가 오키나와에 상륙했고 본토로 밀고 올라가는 격전지가 되면서 많은 수의 민간인 사상자가 바로 이 류큐국 출신 민간인들이었다.

일본에 점령당해 일본이 패망하기만을 바랬던 많은 나라들과 달리 이들은 결국 독립을 이루지 못했다.

아까도 언급했듯이 미 해병대가 최초로 상륙한 곳이 바로 오키나와였고 전 후 전 국토의 85%가 미군 기지화 되었는데 만약 이 류큐국을 독립국으로 인정해 버린다면 일본에 대한 감시를 목적으로 주둔시킨 병력 자체가 정치적인 문제로 무용지물이 될 가능성이 높았으며 전쟁 중 발생한 오키나와 민간인 피해 문제 역시 패전국을 상대로 우월한 입장에서 상대하는게 아닌 전혀 다른 제 3국에 대한 동등한 입장에서 상대해야 하기에 당시의 미국 입장으로서는 여러가지로 난처하기 때문이다.

결국 일본의 패망에도 불구하고 류큐국은 독립을 하지 못했고 몇십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오키나와인이 일본 본토로 가기 위해서는 비자를 발급 받아야 하는 등의 차별을 당하기도 했다.

이러한 일본의 차별도 문제지만 2005년 당시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만 보더라도 1029명의 류큐인 중 40.6%는 '자신들이 오키나와인이며 일본인과는 뚜렷하게 구별된다'고 할 정도로 민족적 의식도 뚜렷하기 때문에 류큐 독립운동을 펼치기도 했으나 이미 정치, 경제적으로 완벽히 일본에 귀속되어 버린 현실에 독립 지지는 24.9% 밖에 그치지 못했고 그마저도 매년 떨어지는 추세다.

하지만 우리가 오키나와를 절때 일본과 동일 시 해서 볼 수 없는 이유가 과거 우리나라와 류큐는 서로 인도주의적인 움직임을 보였기 때문이다.

가령 예를 들어 왜구에 붙잡혔던 고려인을 보호하여 고려로 돌려보낸 적도 있고 왜구에게 잡혀 류큐에 팔려간 44명의 조선인을 쇄환시킨 일이 있기도 하며 이 뿐 아니라 류큐인들이 제주도나 경상도에 표류한 일과 반대로 조선인이 류큐국의 요니구시 섬에 표류한 적도 있는데 다시 서로의 나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도와준 일도 있었다.

게다가 임진왜란이 발생하기 전 일본이 명나라를 정벌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달라 조선에 요구했던 일은 한국인이라면 누구든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때 류큐국이 아니었다면 도리어 조선이 일본과 명나라에 쌈싸 먹히는 사태가 발생할 수도 있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이 있을까?

위에 서술한 일본의 요구에 되려 명나라는 범인이 제 발을 저리듯 조선이 일본에 협력해 명을 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을 품었던 것이다.

조선 역시 재빨리 사신을 보내 해명을 했으나 만약 이때 류큐국 사신이 일본의 침략 준비를 명나라에 알리지 않았다면 오해가 쉽게 풀리지 않았을 것이고 명나라의 전쟁 준비 역시 늦어져 우리나라는 조선시대부터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했을지 모를 일이다.

이에 그치지 않고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명나라와 조선을 정복하기 위해 류큐국에 협조할 것을 명령했지만 명나라의 책봉국이기도 했던 류큐국은 이를 거절, 오히려 역으로 명나라에 일본 공격을 제안하기도 했다.

그리고 잠시 쉬어가는 의미로 재미있는 사실 하나를 짚어볼까 한다.

류큐국이 실은 3개의 왕국으로 100년간을 지내다 1429년 통일이 되었다는 것과 오키나와 지방의 영웅으로 추앙받는 의적 '오야케아카하치'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오야케아카하치는 또 다른 이름으로 '혼가와라', 우리나라식 대로 한자를 그대로 읽으면 '홍가왕'으로 불린다는 것이다.

홍가왕, 의적.

누군가 떠오르지 않는가?

바로 허균의 소설 '홍길동전'의 주인공인 '홍길동'이 떠오른다.

실제로 홍길동전의 말미엔 홍길동이 율도국을 공격하여 왕을 항복시키고 세개의 나라를 세웠다고 나온다.

하지만 1429년에 통일이 되었던 류큐국과 1440년 경에 태어난 홍길동의 출생 일자만 보더라도 홍가왕을 홍길동과 동일시 하기엔 무리가 따를 것이다.

당시 류큐와 조선은 비록 뱃길 사이에 왜구가 자주 출몰하고 류큐국 사신을 사칭한 일본 상인 문제로 인해 중국을 통한 간접 교류를 행했지만 서로간 어느정도 친선이 있었기 때문에 충분히 홍길동전의 이야기 역시 류큐로 흘러들어갈 수 있었을 것이고 거기다 당시 오키나와엔 홍씨 성을 쓰는 사람이 없었다는 것을 보면 홍길동의 이름을 빌려 활동하였거나 홍길동의 후손일 가능성 역시 배제할 수는 없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이러한 류큐를 통해 배울 수 있는 점은 하나다.

아무리 민족이 다르고 역사가 다르다 하더라도 식민 생활이 오래되면 비록 민족적인 인식이 있다 하더라도 정치, 경제적으로 발이 묶여버릴 수도 있다는 것이다.

독립을 하고 싶어도 하지 못하고 아무도 관심조차 가져주지 않는 류큐국의 현실에서 일본의 패망으로 인해 독립을 할 수 있었던 것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지, 나라가 없는 설움과 애국이 무엇인지 다시 한번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2) 급속하게 번진 이념대립 - 중화 인민 공화국과 중화민국


19세기, 유럽의 서구열강들은 조금이라도 더 많은 부를 축적하기 위해 전세계를 돌아다니며 무력과 불합리한 조약을 통해 식민지를 늘려갔다.

아시아의 초강대국이었던 청나라역시 이는 피해갈 수 없었고 황제국이라는 자존심으로 대항했지만 결국 앞선 기술로 밀고 들어오던 신식 군대의 힘에는 굴복할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시작된 청나라의 쇠퇴는 결국 1911년 신해혁명을 통해 완전히 무너지게 되었고 중국 역사 및 아시아 최초로 공화제 정부가 수립됐다.

허나 통치자였던 위안스카이의 무능함과 잇다른 권력 야욕에 민중은 다시 봉기했고 위안스카이 사 후 각지의 군벌들이 내전에 돌입하게 되지만 국민당과 공산당이 제 1차 국공 합작을 결성, 북벌을 감행하여 차례대로 직례군벌, 안휘군벌, 펑톈군벌을 정복함으로서 다시 통일된 중국을 만들 수 있었다.

하지만 북벌 기간 중 장제스에 의해 감행된 공산당 숙청이 불씨가 되어 제1차 국공 내전이 발발하여 다시 전쟁이 시작됐으나 이미 숙청으로 인해 괴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었던 공산당은 명맥만 남긴채 후퇴를 하게 되고 다시 국민당 정부 주도 하에 중국의 역사는 쓰여지게 된다.

그 후 1937년, 일본 제국의 대 중국 침략이 본격화 되자 국민당은 다시 한번 공산당과 손을 잡고 제 2차 국공 합작 연합을 수립하고 일본군을 공격하지만 국민당 소속 국민 혁명군은 연일 일본군에 패해 세력이 약화되었고 공산당 소속 팔로군과 신사군은 그 세력이 비약적으로 커져만 갔다.

1945년 일본 제국이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고 다시 세계는 평화로워지는 듯 했으나 비단 중국은 달랐다.

시작부터 3세력의 견제를 위한 연합이었던 만큼 국민당과 공산당의 사이는 일본 제국과의 전쟁이 종결되자 마자 다시 멀어지고 결국은 일본의 점령지 배분을 놓고 무력 충돌을 하게 된다.

국민당군의 공격으로 시작된 제 2차 국공 내전은 초반엔 병력, 장비, 보급 등 모든 면에서 국민당이 우세했지만 점령지를 무리하게 늘려 병력이 분산되는 전략적 오류를 범하게 된다.

게다가 국민당 정부의 총체적 부패, 인플레로 인한 경제 붕괴, 그리고 이미 떠난 민심이 어우러져 1948년부터는 공산당 측에 유리하게 내전이 전개되었다.

1948년 공산당군이 만주에서 국민당군을 격파하는 것을 시작으로 전세는 역전되어 1949년 2월에는 베이징이 함락되었고, 이어 파죽지세로 4월에는 창강을 건너 국민당 정부의 수도 난징을 함락시켰다.

이어 5월에는 최대 도시 상하이를 함락시켰고 10월에는 국민당 손에 남아 있던 최후의 대도시인 청두마저 함락되어 장제스와 국민당 정부는 대만으로 도피하였다.

결국 본토는 공산당 체제의 사회주의 정부가, 대만은 국민당 체제의 민주주의 정부가 출범하여 아직까지도 반목이 지속되고 있다.

그 이후로 21세기가 된 지금까지 이 두 국가는 우리나라와 비슷하게 이념 대립을 겪고 있지만 서로에 대한 불신이 우리나라 만큼은 깊지 않아 중화민국(이하 대만)의 기술과 중국의 노동력이 결합되어 수익을 창출하기도 하고 정치적 통일을 모색하기도 한다.

게다가 현재 중국은 영국과 포르투갈로부터 반환된 홍콩과 마카오를 중국 본토와는 다르게 특별 행정구로 지정하여 정치, 경제에 대해 일체 간섭을 하지 않고 있고 이를 빌미로 하여 중국은 전혀 불가능 할 것 같은 일국양제(一国两制)를 실현시킬 수 있는 나라라 자부하며 중국과 대만의 통일이 불가능은 아니라고 하지만 이는 조금 더 두고 봐야 할 일이다.

왜냐하면 기본 법에 명시된 일국양제의 시한은 50년으로 되어 있고 이에 따라 홍콩과 마카오의 정치, 경제에 대한 보장은 각각 2047년, 2049년으로 이 기한이 지나 중국 중앙 정부에서 홍콩과 마카오의 정치, 경제를 흡수하기로 결정하면 그대로 끝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대만에서도 경제적인 협력은 지향하지만 정치적인 통일은 반대하는 것이다.

만약 시국이 바뀌어 대만이 중국에 흡수 통일이 되고 홍콩과 마카오처럼 특별 행정구로 남는다 하여도 역시나 두고 볼 일이다.

이는 과거 중국에서 발생한 민주화 운동인 톈안먼 사건을 중국 정부가 무자비하게 탄압한 역사를 통해 유추해 볼 수 있는 항목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시대가 많이 바뀌어 인권 존중 사상이 강해지고 있는 실정이지만 텐안먼 사건을 비롯한 국내에서 발생한 시위를 무자비하게 탄압했던 중국 정부의 대응을 보자면 시대가 바뀌어도 대응 방법에 있어선 변화가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이런 중국을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하는 이유를 몇가지 설명하고 마치도록 하겠다.

현재 중국에서는 동북공정 프로젝트가 진행이 되고 있다는 건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을 것이다.

게다가 북한은 당장 정권이 붕괴가 된다 해도 이상할게 없을 정도로 위태로운 상황이며 별 다른 선택권 없이 중국의 지원을 받아 국가 기틀이 유지가 되고 있다.

만약 이 상태로 시간이 흘러 정말 북한 정권이 붕괴라도 된다면 중국은 재빨리 북한에 대한 영향력을 행사해 흡수, 현 북한의 영토를 조선 자치구로 바꿀 가능성이 적지 않다.

그렇게 되면 한민족의 기틀이 되었던 고조선의 역사를 자연스레 중국의 역사로 편입하고 우리내 역사는 4천년이 아닌 2천년짜리 뿌리도 없는 반쪽 역사가 될 것이다.

현재 중국은 '하나의 중국'이라는 모토 아래 역사, 문화, 경제, 정치를 공산당 주도 하에 획일화 시키는 작업을 진행 중이다.

중국 영토 내부에 조선족이 중국의 국적을 가지고 생활하고 있고 때문에 조선족과 같은 민족이나 다름없는 우리 한민족은 중국의 입장으로 봤을때 흡수하여 자국민이라 우겨도 이상하지 않은게 현실인 것이다.

이미 내몽골 자치구에 대한 중국 공산당의 작업은 막바지에 들어서 이 지역에 살고 있는 몽골인들은 자신을 자랑스런 중국 인민으로 인식하고 있고 몽골족의 위인인 칭기즈 칸과 몽골족이 건국한 원나라를 중국의 역사로 인식하고 있다.

중국의 대외 팽창 정책이 계속되고 있고 이미 여러 사례를 통해 입증된 결과들을 유추해 볼때 우린 그 어느 국가들보다 중국을 조심해야 한다.

그리고 홍콩과 마카오가 영국과 포르투갈의 식민지에서 다시 중국으로 반환이 될 때까지 세월을 기다린 중국의 인내심 역시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1) 한민족의 분단 - 대한민국과 조선 민주주의 인민 공화국




  1945년 8월 15일, 2차 세계 대전을 일으켰던 나치 독일의 항복에 이어 일본 제국이 연합군에 무조건 항복한 날이다.

연합국 입장에서는 2차 세계 대전이 종전된 기념일에 불과하겠지만 한반도에 살던 한민족에게는 36년간의 치욕적인 식민 지배에서 벗어난 범국민적인 해방일이었다.

하지만 한민족에게 진정한 의미의 해방은 돌아오지 않았다.

일본이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기 전부터 일본의 항복 이후 한반도를 분할, 신탁통치 하기로 결정했던 연합국은 북위 38도에 선을 그어 북쪽은 소비에트 연방(이하 소련)이, 남쪽은 미합중국(이하 미국)이 관리하는 체제로 들어가게 된다.

옛 조선의 국민들 대부분은 남북 분단이 아닌 통일 정부 수립을 지지했지만 종전 이전부터 동북아로의 이념 확대를 노렸던 소련과 이를 탐탁치 않아 하던 미국은 서로에 대한 견제를 위해 각각 자신들을 따르는 정재계 인사들과 지식인들을 이용, 남과 북을 분할 하기에 이른다.

우선 이북에서는 소련의 지지를 받는 김일성을 필두로 조선 민주주의 인민 공화국(이하 북한)이 수립됐고 이남에서는 미국의 지지를 받는 이승만을 필두로 대한민국이 수립되었다.

하지만 이 두 지도자는 일찌기 민족의 화합보다는 자신들의 권력과 이익을 더 중요시하는 움직임과 뜻이 있던 인물들로 이들이 이끄는 각각의 정부는 언제 충돌하더라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시작부터 서로를 공격, 견제하게 된다.

신탁통치가 종료된 이후 부터 이 두 국가는 기다렸다는 듯 소규모 국지전을 발생 시켰지만 미국은 CIA의 '북한의 남침 가능성은 낮다.'는 보고서를 신용했기에 별 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그런 미국에 반해 소련과 국공내전을 통해 타이완섬을 제외한 전 국토를 공산화 시킨 중화 인민 공화국(이하 중국)은 북한의 김일성에게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했다.

이윽고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새벽 4시, 훗날 6·25전쟁, 한국전쟁, 조국해방전쟁 등으로 명명된 전쟁이 소련과 중국의 지원을 받아 완전 무장한 인민군의 38도선 남하를 시작으로 발발하게 된다.

약 3년 1개월간에 걸친 이 전쟁으로 대한민국과 북한 두 국가의 민족은 같은 역사, 같은 핏줄을 이루는 동족임에도 불구하고 서로에게 지울 수 없는 큰 상흔을 남겼다.

21세기가 도래하고도 9년이 흘렀지만 끝이 보이지 않는 이 반목은 계속되고 있으며 북한의 계속된 도발로 인해 언제 휴전 협정이 깨어질지 모르는 불안한 상황이 계속되고 있다.

인류 역사상 유일무이하게 세계가 양분되어 대립한 이념 전쟁으로 기록된 이 일련의 사건을 통해 한반도는 세계에 산재한 여러 '역린'중 하나가 되었다.

하지만 동북아 대부분의 국가들은 정치, 군사력, 경제력등이 매우 안정된 상황으로 접어들었고 그렇기 때문에 다시 전쟁으로 번질 확률은 매우 적다.

일단 대한민국에서는 동족상잔의 비극을 다시 재현할 수는 없다는 여론과 '한강의 기적'이라 부를만큼 비약적으로 성장한 경제력을 상실할 수도 있는 2차 한국 전쟁을 원치 않고 있다.

또한 북한 역시 세계 정세가 미국에 유리하게 돌아가는 상황에서 다시 한번 전쟁이 발발한다면 이번에야 말로 자신들의 정권이 철저하게 유린되고 붕괴될 수 있다는 계산을 하고 있기에 겉으로는 총진격, 남진통일등을 부르짖고 있지만 본심은 전쟁을 원치는 않고 있다.

게다가 바다 건너 이웃인 일본의 경우 과거 한국 전쟁에선 큰 피해를 입지 않았지만 다시 전쟁이 발발한다면 북한의 공격 사정권 내에 자국이 포함되어 있어 대한민국 못지 않은 피해를 볼 것으로 예상해 대한민국 만큼이나 전쟁이 되풀이 되는 걸 원치 않는다.

대한민국이나 북한, 일본 외에도 중국, 러시아, 미국 등 다양한 국가들이 여러가지 이유로 다시 전쟁이 발발하는 걸 원치 않고 있지만 이 국가들은 전쟁 뿐만 아니라 통일 역시 원하지 않고 있다.

한반도에 인접한 중국과 일본은 한반도의 두 국가가 통일할 경우 경제적, 군사적으로 자신들을 앞지르거나 동급이 될 것을 우려하고 있고 러시아는 현재 미국과 우방 관계인 대한민국의 주도로 한반도가 통일이 된다면 동북아의 정세가 미국이 이끄는 데로 흘러갈 것을 우려해 내심 통일을 원치 않는다.

미국은 한반도 분단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실익(무기 판매)이 줄어들 것을 우려하고 있고 중국, 러시아와의 마찰을 피하기 위해 현 상황 유지를 지지하는 편이다.

북한은 현재 자국의 경제적,  외교적 위기를 타파하기 위해 북한 주도로 하는 통일을 원하고 있지만 현실적으로 매우 불가능한 시나리오라 행동으로 옮기진 못하고 있다.

이에 반해 대한민국은 경제적, 정치적으로 다른 두 부류가 여러가지 이유로 통일을 반대 혹은 찬성하고 있다.

한국 전쟁 이전의 역사를 상당 부분 공유하고 있는 이 두 국가는 세계 정세라는 이름의 거대한 거미줄에 걸린 한마리 잠자리 같은 상황이며 움직이면 움직일 수록 얽매일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진퇴양난의 처지에 놓여있는 실정이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이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선 북한의 의견을 일정부분 받아들여 1국 2체제 연방국 형태로 통일된 한반도의 시대를 열고 서로 의견을 조율해 서서히 하나의 정부로 거듭나는 것 만이 유일하다 생각한다.

물론 통일을 하기 앞서 어느 정도 준비는 해 두고 거사를 치뤄야 겠지만 말이다.

(의견을 일정부분 받아들이고 조율해 연방국 형태의 통일을 지향한다는 말이지 현재 북한에서 내새우는 말도 안되는 조건을 모두 수용하자는 말이 아니니 오해 없길 바란다.)

비교적 성공적인 통일이라 평가 되는 독일과는 여러가지로 상황이 다르지만 그들의 역사와 정치적 상황등을 참조하는 것도 좋은 방법일 것이다.

아무튼 한반도에 살고 있는 한민족이 한발자국 더 앞으로 나아가 발전하기 위해선 통일은 필수적인 요소이자 반드시 거쳐야 할 성인식이라 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통일을 위해 세습 왕조의 형태를 갖춘 현 북한의 정권이 당장 붕괴되길 바라는 것도 큰 어리석음이다.

어느날 갑자기 북한 정권이 붕괴하게 된다면 북한은 강대국들의 정치적 각축장이 될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며 통일은 고사하고 또 다시 강대국들에 의해 갈기갈기 찢겨 동족상잔의 비극을 재현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아무리 같은 민족이라 할 지라도 분단 이후 오랜 시간이 지나게 되면 국민들의 사상이나 경제력이 현저하게 달라져 현실적으로 통일이 더욱 어려워 지게 된다.

과거 프랑크 왕국이 서프랑크, 중프랑크, 동프랑크 왕국으로 나뉘어 현재의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로 이어진 것 처럼 분단 후 서로 대립되는 상황이라면 통일은 점점 시간이라는 이름의 미궁으로 빠져들게 될 것이다.

때문에 한반도의 통일은 그 무엇보다 먼저 풀어내야 할 한민족의 숙제이자 사명인 것이다.

마지막으로 세계의 사상과 이해 관계, 이윤 추구에 의해 분단된 한반도의 현실은 함부로 건드려선 안되는 역린이자 언젠가는 해결해야 할 세계의 약점 중 하나라는 점을 강조하며 이만 글을 줄인다.

Prologue

이번에 대대적으로 다뤄볼 주제는 바로 세계의 약점이다.

워낙 방대하기에 여러번에 걸쳐 진행될 예정이며 과거에 있었던 분쟁이나 사건, 그리고 앞으로도 발생할 수 있는 분쟁이나, 사건 등을 집중적으로 파헤쳐 기술할 것이다.

이 포스팅을 통해 어리석은 당(黨)이나 국가 지도자의 빗나간 결정 혹은 추악함이 얼마나 많은 내 이웃, 내 가족을 비롯, 전 세계 인류에게 고통과 슬픔을 안겨줄 수 있는지 알아 보도록 하자.

포스팅에 앞서 필자가 이야기 하는 '세계의 약점'이란 어떤 것인지 개념부터 설명해 보도록 하겠다.

※세계의 약점이란?

전 세계는 다양한 인종, 다양한 사상, 다양한 신분을 가진 인류의, 일종의 유기 화합물 복합체라고도 할 수 있다.

워낙 다양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세상이다 보니 정치적, 물리적으로 충돌이 벌어질 때도 많고 화합을 이룰 때도 많다.

하지만 이런 물리적 충돌이나 화합이 단순한 우연에서 발생하는 일은 절대로 없다.

누군가의 계획이나 행동에 따라 철저히 '고의적'인 시도에서 발생하는, 눈에 보이지 않는 생산물인 것이다.

앞으로 기술할 세계의 약점이란 바로 조그마한 불씨 하나로도 국가간의 큰 충돌을 야기할 수 있는 일종의 역린(逆鱗)이라 할 수 있다.

그럼 이제 그 역린이 무엇인지 되도록 상세하게 파헤쳐 보도록 하겠다.
 
 
"정치에서 우연이 일어나는 일은 없다. 어떤 일이 일어났다면 그렇게 계획되었기 때문에 일어난 것이다."
프랭클린 D. 루즈벨트 1882.1.30~1945.4.12